입생로랑의 창시자 이브 생 로랑
연인 피에르와 입생로랑 공동 창립
2008년 교모세포종으로 사망

젊은 나이에 데뷔해 패션계에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여성 패션 역사에 수많은 “최초”를 남긴 패션 디자이너가 있다. 그는 최초로 여자에게 남자 수트를 입혔고, 모델으로 흑인 여성을 처음으로 기용했다. 또한, 음악과 퍼포먼스를 반영해 지금의 패션쇼와 같은 형태를 갖춘 쇼를 최초로 선보이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이브 생 로랑’이다.
이브 생 로랑은 1936년 8월 1일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 오랑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두 여동생 그리고 어머니와 패션 잡지를 보며 자라 여성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어머니는 그런 그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디자인 콘테스트에 패션 디자인 스케치를 출품하도록 했다. 그는 국제 울 사무국이 주관하는 ‘젊은 패션 디자이너 공모전’에 3개의 스케치를 제출했고, 17살의 나이에 이 공모전에서 3등을 차지했다.

당시 파리에 머물던 이브 생 로랑은 프랑스 패션 매거진 보그 편집장이었던 미셸 브루노프를 만나면서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가능성을 엿보게 된다. 이브 생 로랑은 미셸에게 자신이 그린 스케치를 보여 줬고, 미셸은 그 스케치에 깊은 감명을 받아 ‘제대로 패션 디자이너가 돼보는 것이 어떻겠냐’라고 제안했다.
생 로랑은 이에 그의 충고를 따르기로 하고 파리에서 패션 디자인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 의상 조합 학교에 입학한다. 이후 그는 세계적인 대회에서 칼 라거펠트를 제치고 칵테일 드레스 부문에서 1위를 할 정도로 성장해 미셸을 놀라게 했다.
무엇보다 그가 1위를 차지한 스케치는 당시 업계 매출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프랑스 패션계에서 엄청난 위상을 자랑하던 크리스찬 디올의 것과 똑같을 정도로 뛰어났다. 이에 미셸은 장 이브 생로랑을 크리스찬 디올에게 데려갔고, 그는 크리스찬 디올의 보조 디자이너로 일할 기회를 얻게 된다.

그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것은 21살 때의 일이었다. 크리스찬 디올이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어린 나이에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가 된 것이다. 그는 1958년 봄 컬렉션에서 “트라페즈 드레스”라는 창작물을 발표하게 되고, 이 드레스는 생 로랑을 국제적인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생 로랑이 언제나 성공가도를 달렸던 것은 아니었다. 보수적인 디자인에 지루함을 느끼게 되면서 디올의 주 고객층인 상류층 귀부인이 좋아하지 않을 만한 파격적인 옷들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실험 정신은 디올의 매출에 큰 타격을 입혔다. 결국 생 로랑은 알제리 독립 전쟁으로 인해 징병을 가 있는 동안 당시 디올의 수장으로 있던 마르셀 부삭으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게 된다.

이때 생 로랑은 동료 병사들과의 트러블과 군 생활의 스트레스로 인해 군병원에 입원 중인 상태였는데, 그 해고 소식은 그의 정신 질환을 더 악화시키는 데 일조했다. 그런 그가 재기하도록 도운 것은 그의 파트너이자 기업인이었던 피에르 베르제였다.
피에르 베르제는 1960년 실의에 빠져 있는 생 로랑을 대신해 디올 하우스를 계약 위반 혐의로 고소해 48,000파운드를 보상받았고, 생 로랑만의 패션 하우스를 열 수 있도록 도왔다. 그 결과 미국의 백만장자 ‘마크 로빈슨’으로부터 받은 자금을 기반으로 1961년 이브 생 로랑 자신의 이름을 딴 ‘이브 생 로랑(YSL)’을 설립한다.

생 로랑은 이브 생 로랑을 열고 수많은 혁신을 하면서 패션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특히 그는 1966년 선보인 여성 턱시도 ‘르 스모킹’을 통해 여성들의 복식에 대한 편견을 완전히 타파했다. 당시 여성들은 공공장소나 격식 있는 자리에서 바지를 입으면 예의에 어긋난다고 여겨졌는데, 그가 선보인 턱시도로 인해 이 같은 문화가 바뀌기 시작했다.
1968년에는 속옷 없이 착용하는 ‘시스루 드레스’ 디자인을 세계 최초로 제작했다. 1979년에는 상류층을 타깃으로 하는 오뜨꾸뛰르 컬렉션에서 세계 최초로 흑인 모델을 기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수많은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시도들로 생로랑은 패션계에 연일 화제를 일으켰고,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 중 한 사람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그가 남긴 브랜드 이브 생 로랑은 1990년대 이후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침체기를 맞게 되었고, 1993년 프랑스의 제약회사인 사노피에 인수되었다. 이브 생 로랑 본인 또한 2008년 교모세포종을 앓다가 건강 악화로 인해 프랑스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