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공으로 자란 이재명
누나 덕 본 김문수
엘리트 집안 이준석

“비록 오랫동안 아버지를 증오했지만, 돌이켜보면 그 감정은 오히려 불과 물, 망치가 되어 나를 담금질한 셈이었다. 해가 바뀌고 나이가 들수록 그 선물의 진정한 의미를 절실히 깨닫는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는 2017년 발간한 자서전 『이재명은 합니다』에서 아버지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이같이 표현했다. 부모와 형제, 자녀 등 가족은 한 개인의 가치관과 성격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존재다. 대선 후보들의 삶에도 중요한 전환점마다 가족의 이야기가 자리하고 있다.

이재명 후보는 경북 안동의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부친 이경희 씨는 대구 청구대 법학과(현 영남대 전신)에 입학했을 정도로 지역 내에서는 학력 있는 인물로 알려졌지만, 학비 문제로 학업을 중단하고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이 후보는 아버지로부터 뛰어난 두뇌를 물려받았지만, 정작 아버지에게는 애증이 뒤섞인 감정을 품고 있다.
아버지는 도박에 빠져 이 후보가 초등학교 3학년이던 시절 집을 떠났고, 어머니 구호명 씨는 남의 집 허드렛일로 7남매의 생계를 책임졌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아버지가 가족을 성남으로 데려오면서 재회했지만,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공부보다 돈을 벌기를 원했다.

이재명 후보는 소년공으로 일하며 학업을 병행했고, 중등 검정고시를 준비하며 단칸방에서 밤을 새우곤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공부해서 뭐 하냐”며 꾸짖었고, 이 후보는 그 시기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던 경험도 털어놨다.
이후 이재명 후보는 중앙대학교 법대에 진학했고, 사법시험을 준비하며 성장했다. 이 후보는 배우자 김혜경 씨와 슬하에 두 아들을 두고 있다. 이 후보는 질병으로 군 면제를 받았지만, 두 아들은 모두 공군 병장으로 만기 전역했다. 다만 지난 대선 과정에서 장남의 불법 도박 의혹이 제기되자, 이 후보는 “실망하셨을 분들께 아버지로서 아들과 함께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경북 영천의 경주 김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부친 김승헌 씨는 일제강점기 중학교를 졸업한 뒤 신라 왕릉을 관리하는 9급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김 후보는 7남매 중 여섯째로, 정미소를 운영하던 시기에 태어났지만, 초등학교 4학년 무렵 부친이 빚보증을 잘못 서면서 살던 집을 잃고 영천 읍내의 판자촌으로 이사해야 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환경에서 어머니 조순조 씨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했다.
김 후보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던 데는 가족의 헌신이 있었다. 특히 둘째 누나는 중학교 시절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성적이 우수했지만, 가정 형편상 대학 진학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결국 고등학교 졸업 후 대구 전화국에 취직한 둘째 누나는 김 후보의 경북중·고로 이어지는 대구 유학을 함께하며 모든 생활을 뒷바라지했다.

반면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는 이들과는 다른 성장 배경을 가지고 있다. 서울 노원구 상계동과 양천구 목동에서 유년기를 보낸 이 후보는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다. 부친 이수월 씨는 경북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대우상사와 굿모닝신한증권(현 신한금융투자)에서 강남지점장, 국제영업부장 등을 지냈다. 모친 김향자 씨는 고등학교 교사 출신으로, 자녀 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동생 역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 일하고 있다.
이 후보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으며, 정치 입문 전인 2007년에는 ‘배움을 나누는 사람들’이라는 비영리 교육봉사단체를 설립해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활동을 펼쳤다. 공정한 경쟁과 실력주의를 주요 가치로 내세우는 이 후보의 정책 방향은 성장 배경과도 맞닿아 있다.
이 후보의 모친은 지난해 총선 유세에서 유세차에 올라 아들을 위한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칼로 베인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낫지만, 정치인 이준석이 당대표직에서 물러나는 과정을 지켜본 엄마의 심정은 심장에 칼이 꽂히는 듯했다”고 전했다.
댓글2
싸이코 패스 새끼
자살을 시도했을때, 성공 했더라면 지금의 이시끄럽고 도덕성이 훼손된 후보는 없었을것을~~아쉬운 마음은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