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 정주영 회장
70원 들고 가출한 일화
막노동으로 자본금 모아
한때 재계 순위 1위를 기록한 대기업을 만든 창업주는 ‘재벌’이라는 표현을 싫어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부둣가 막노동과 건설 현장 돌 나르기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던 그의 삶에서 재벌이라는 표현을 노동의 의미를 거세한 단어로 여긴 것이다. 어릴 적 가출만 4번을 하고도 국내 재계 순위 1위에 달하는 대기업을 만들어내고도 재벌이라는 표현을 싫어했다는 회장님은 누구일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현대그룹 창업주인 정주영 회장이다. 정주영 회장은 앞서 밝힌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회고록 <이 땅에 태어나서>에서 밝혔다. 그는 “작업을 몰아칠 때는 혼이 나가도록 무섭게 몰아쳤지만, 기회 있을 때마다 수많은 기능공과 한데 어울려 허물없이 술잔도 나누고 팔씨름도 나누면서 육체적으로 고달픈 그들의 휴식에 동참하고는 했다.”와 같은 말을 한 것으로 알려지며 재계 회장님답지 않은 소탈한 모습을 자주 드러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정주영 회장이 국내 굴지의 대기업을 만들어낸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흙수저 출신으로 자수성가에 성공한 정주영 회장은 유년 시절, 돈을 벌기 위해 가출을 자주 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현대그룹 역시 작은 쌀가게에서 시작됐다는 점에서 그가 돈을 버는 것에 얼마나 간절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정주영 회장은 돈을 벌기 위해 가출을 4번이나 강행한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로 정주영 회장의 아버지 정봉식은 강원도 통천에 4,000평의 논과 밭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살림이 빠듯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난 정주영 회장은 아버지를 따라 농사 일을 했지만 전망이 없을 것으로 판단해 가출을 강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3번째 가출에서 아버지가 소를 팔아 번 돈인 70원을 가져가 서울 부기 학원에 다녔지만, 다시 아버지에게 잡혀 농사를 돕게 된 일화는 유명하다.
이어 4번째 가출 만에 정주영 회장은 성공의 기회를 엿보게 된다. 다시 서울 복흥상회라는 쌀집에 배달원으로 취직한 정주영 회장은 그의 성실함을 눈여겨보던 쌀집 사장의 눈에 들었다. 당시 정주영 회장의 나이가 24살이었던 점을 감안해도 자신의 쌀집을 사실상 남에게 물려주기란 쉽지 않았을 결정으로 추측된다. 다만, 정주영 회장은 성실함으로 복흥상회라는 쌀집을 물려받아 경일 상회로 간판을 바꾸고 성공을 거두게 된다.
당시 쌀집 사업의 경험은 훗날 현대그룹을 만들어내는 토대가 됐다. 쌀집으로 돈을 번 뒤 정주영 회장은 자동차 수리공장 사업을 해오다가 1947년 건설회사인 현대토건사를 차렸다. 특히 당시 통역장교로 복무한 동생 정인영의 도움으로 주한미군 관련 공사를 대부분 수주하면서 현대그룹의 기반을 마련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가 한국전쟁 이후 폭파된 고령교 공사 복구를 맡았을 당시 큰 공사 경험이 전무한 상태라 장비 부족, 인부 파업 등 고난에 시달렸지만, 그는 ‘신용’을 강조하며 개인 자금을 쏟아부어 1955년 완공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큰 사업 규모의 공사를 경험해 본 정주영 회장은 현대건설을 필두로 지금의 현대그룹을 만들어내게 된다.
고령교 완공 이후 국내 최초로 해외 공사인 태국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 수주를 따낸 정주영 회장은 이 경험을 필두로 대한민국 경제의 중심,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맡게 된다. 다만, 국내 최초의 해외 공사는 비록 적자가 300만 달러 이상 초과한 실패한 공사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대건설이 업계에서 자리 잡자, 조선업으로 사업 확장을 감행한 정주영 회장은 대형 조선소를 건설하기 위한 차관을 얻기 위해 해외를 돌면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영국의 조선회사 A & P 애플 도어의 찰스 롱바톰 회장을 만나 설득을 시작한 정주영 회장은 비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롱바톰 회장에게 한국의 오백 원 지폐를 꺼내 거북선 그림을 보여주며 영국보다 300년이 앞선 조선의 조선업을 어필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는 영국 은행에서 돈을 빌리려면 사업계획서와 추천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주영 회장의 진심과 한국의 가능성을 인정한 롱바톰 회장은 결국 바클레이즈 은행 추천서를 보냈고 공사에 착공한 지 2년 3개월 뒤에 현대그룹은 국제 규모의 조선소를 준공할 수 있었다. 이후 사업 영역을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증권, 현대엘리베이터 등으로 확대하게 된 정주영 회장은 국내 굴지의 대기업 현대그룹을 만들어내게 된다.
한편, 정주영 회장은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남들은 내가 부자라고 부러워도 하고 질투도 하지만 실상 나 자신은 부자라는 감각을 느끼지 못하며 산다.”라고 밝히며“ ‘내 재산’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쌀가게를 할 때까지였다. 차츰 일을 키우면서, 기업이 성장하면서는 일이 좋아 끊임없이 일을 만들어 나갔을 뿐 내 재산을 늘리기 위해서나 대한민국에서 첫째가는 부자가 되기 위해서라는 의식은 진실로 티끌만큼도 없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그 사람은 착실하다, 성실하다, 정직하다는 신뢰만 얻으면 그것을 자본으로 자신의 생애를 얼마든지 확대,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나는 장사도 기업도 돈이 있으면 더욱 좋고, 돈이 없어도 신용만 있으면 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으로 안 사람이다.”라고 말하며 신용과 의지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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