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그룹 김우중 회장
500만 원 샐러리맨 신화
역사상 최대 규모의 파산
지금으로부터 약 57년 전인 1967년 3월 서울 충무로의 작은 사무실에서 자본금 500만 원의 작은 무역상으로 출발한 이 회사는 한 때 재계 서열 2위까지 오를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그러나 IMF의 파고를 결국 넘어서지 못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는데, 현재 이 회사의 경영은 2024년인 지금도 그 뿌리를 이어받은 일부 기업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대우그룹이다.
500만 원을 들고 대우그룹을 만든 창업자는 故 김우중 회장으로 알려졌다. 김우중 회장은 어려운 가정환경에서도 연세대 경제학과를 진학하며 주경야독의 시간을 보낸 김우중 회장은 1960년 한성실업이란 무역업체에 입사하며 무역상으로서의 첫발을 디뎠다.
당시 김우중 회장이 다니던 한성실업은 국내 최초로 ‘트리 코트(메리야스로 짠 직물)’를 수출했는데 김우중 회장이 업무를 맡게 되면서 동남아 일대로의 수출계약을 잇달아 따내는 성과를 보였다. 이때 생긴 김우중 회장의 별명이 ‘트리 코트 킴’으로 알려졌다.
이후 동남아 일대의 수출계약을 석권하며 사업에 자신감을 얻은 김우중 회장은 대도섬유 도재환 사장과의 합작으로 자본금 500만 원의 대우 실업을 설립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장인 동시에 회사의 1호 수출사원이 된 김우중 회장은 곧바로 동남아로 넘어가 트리 코트 수출계약 확보에 나서 설립 첫해에만 38만 달러 규모의 제품을 수출했다고 전해졌다.
이는 당시 대형 수출업체들이 연 100만 달러 정도를 수출했단 점을 감안했을 때 그야말로 대박이라 불릴 수 있는 성과를 낸 것이다. 1969년 미국 시어즈 로벅과 JC페니 등에도 납품 계약을 체결하며 미국에도 진출해 사업을 키워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결과적으로 대우실업은 창업 5년 만인 1972년에는 수출 5,300만 달러를 달성하며 국내 최대 섬유 수출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김우중 회장은 회사 규모를 키우기 위해 1969년 새창직물, 1970년 동남섬유 인수를 시작으로 1972년에는 고려피혁, 1973년에는 쌍미섬유와 신성통상을 인수해 섬유 무역 사업의 수직계열화를 도모했다. 이는 경쟁력 강화를 위한 선택으로 이후 본격적인 사업 다각화에 나서면서 동국정밀, 영진토건 등을 인수해 ‘대우건설’을 설립, 동남 전기 인수 등을 진행했다.
대우그룹의 첫 역사는 1973년에 쓰였다고 생각되는데 이 당시 대우그룹이 그룹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대우 빌딩을 사들였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통빌딩으로 불렸던 서울역 앞 대우빌딩은 공사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해 공사가 중단된 상황으로 당시 정부는 관광공사 재원 마련을 위해 워커힐호텔·영빈관·교통 빌딩을 매각했는데 이중 워커힐호텔은 SK그룹이, 영빈관은 삼성그룹이 인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우중 회장은 교통 빌딩 인수를 위해 당시 대우실업의 기업공개(IPO)를 단행하는 것과 동시에 보유 중이던 삼주빌딩 매각에 나섰다. 대우그룹은 이 당시 선택으로 인해 현재의 대우빌딩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어 1975년 종합무역 상사로 지정되며 10개의 계열사를 보유한 전문 기업으로 거듭났다.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던 대우그룹은 대우빌딩 입주 이후 대대적인 사업조정에 나서 기존 섬유 무역에 집중됐던 사업구조를 중공업 분야로 확대해 중후장대 사업 중심의 대우그룹으로 변신을 꿰찼다. 신진그룹 소유의 한국기계를 인수했는데 한국기계는 국내 최대 규모의 디젤엔진 및 산업 기기 생산업체로 사명을 ‘대우 중공업’으로 변경해 운영에 나섰다.
대우 중공업은 대우그룹의 해체 과정에서 옥포조선소로 인적 분할되어 대우 조선해양으로 새로운 출발을 알렸으며, 2022년 한화그룹에 인수되면서 현재는 한화오션으로 사명을 변경해 운영 중이다. 이어 제철화학과 새한자동차를 인수해 ‘대우 자동차’로 사명을 변경해 운영에 나섰다.
한국 조선공사가 소유하고 있던 경남 거제의 옥포조선소를 매입해 ‘대우 조선’을 설립하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이런 과정을 거쳐 대우그룹은 1967년 창업 이후 10여 년 만에 섬유·기계·금융·건설·자동차·조선·중공업을 아우르는 국내 대표 대기업으로 입지를 단단히 했다.
김우중 회장은 70년대 당시 공격적인 확장 전략을 통해 대기업집단으로 성장한 대우그룹을 80년대에는 수출을 통해 매출을 올림과 동시에 내실을 다지는 시기로 삼은 것으로 전해졌다. 대우그룹이 창업 이후 단 10년 만에 국내 4대 그룹으로 성장했던 만큼 내부 단속에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변고의 시간을 겪은 대우그룹은 어느새 내실이 다져진 ‘국내 2위 기업’으로 성장해 ‘세계 경영’으로 눈을 돌렸다. 김우중 회장은 냉전으로 인해 경쟁기업들이 진출하지 못했던 유럽 내 동유럽 국가들과 인도, 중국, 아프리카 등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전략을 택했다. 실제로 대우자동차는 폴란드와 헝가리, 우즈베키스탄 등에 자동차 공장을 인수하거나 설립하며 공격적인 확장에 나서 경쟁기업을 압도하는 저력을 자랑했다.
대우그룹은 국내를 넘어 해외로 영토를 넓혀가며 승승장구할 것처럼 보였으나 1990년 후반 아시아 금융위기를 겪으며 흔들리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동남아를 시작으로 우리나라까지 번졌던 금융위기로 인해 우리 정부가 1998년 IMF(국제통화기금)에 지원을 요청했고, 이 과정에서 국내 기업들은 글로벌 스탠다드 기준의 회계기준을 맞춰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 원인이다.
대우그룹은 대우자동차와 대우전자 등의 매출 부진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이는 삼성과 LG 등이 주력으로 사업하는 부문에서 꾸준하게 기술개발 및 투자를 이어온 것과 달리 대우그룹은 해외에서 기술을 도입하는 방식을 사용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결국 굴지의 대기업으로 불릴 것 같던 대우그룹은 외환위기가 겹치며 그룹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우그룹이 무너진 가장 큰 이유로는 차익경영으로 인한 부채가 거론된다. 1997년 30대 그룹의 부채 총합은 무려 350억 원에 달할 정도였는데 대우그룹이 이 중에서 부채 비율이 가장 높은 수준인 89조 원에 달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 당시 정부 예산이 84조 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대우그룹의 부채 수준이 얼마나 엄청나 수준인지 알 수 있다.
김우중 회장은 석유 파동 당시 대출을 더 늘리며 위기를 극복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외환위기 상황에서도 회계 조작을 통해 부채를 숨기고 대출을 늘리는 방식을 택했는데 일본계 금융사인 노무라 증권의 ‘대우그룹의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보고서가 등장하면서 대우그룹에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탓에 김우중 회장은 대우그룹의 41개 계열사를 10개로 줄이는 대규모 구조조정안을 발표해 사업 정리에 나서거나 대우차를 제외한 전 계열사 매각에 나서기도 했으나 12개 계열사의 어음부도가 발생하면서 워크아웃이 시작되는 상황에 놓였다. 이후 1999년 그룹 임원단이 전체 사퇴를 결정하면서 500만 원으로 재계 2위를 가장 이른 시간 안에 달성했다는 신화는 끝나게 되었다.
1999년 당시 공개된 대우그룹의 마지막 광고는 여전히 사람들을 울리는 광고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자동차 관련 계열사만 남기고 구조개혁을 통해 자동차 전문기업으로 변화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대우그룹의 마지막 의지는 이미 워크아웃을 결정한 상태에서 어떠한 힘도 가질 수 없었다.
대우그룹이 30여 년의 기간 보여줬던 행보와 사업은 그룹 해체 이후에도 재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대우 그룹의 주력 계열사들이 글로벌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어 타 기업들이 인수에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설립부터 몰락까지 정말 불꽃처럼 타올랐던 대우그룹은 현재 포스코인터내셔널, 한화오션 등으로 여전히 그 경쟁력을 자랑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들은 아직도 대우 그룹의 해체를 아쉬워하는 입장을 고수한다. 글로벌 경영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 국내 기업에서 가장 먼저 글로벌 경영에 나섰던 대우그룹에 대한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IMF 당시 대우그룹이 구조조정을 통해 살아남았다면 현재 재계 순위를 뒤엎을 굴지의 기업으로서 위상을 드높일 수 있었을 것이란 평가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