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 예천의 한 가족이 1946년 조흥은행에서 발급됐다는 현금보관증을 근거로 맡긴 돈을 돌려받으려 했지만, 은행은 증서의 진위를 확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사연은 2022년 처음 알려진 뒤 여러 매체를 통해 확산됐다. 당시 ‘100억 원짜리 현금보관증’으로 소개됐지만, 실제로 지급받을 수 있는 금액이 100억 원까지 확정된 것은 아닌 것으로 전해진다.
예천군에 거주하는 김규정 씨의 사연의 시작은 해방 직후인 194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2022년 다수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경북 예천에 거주하던 김규정 씨의 부친 고(故) 김주식 씨는 1910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을 하며 돈을 모은 뒤 1945년 귀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돈을 보관하기 위해 조흥은행의 지역 지점을 찾았고 현금보관증을 받았다는 것이 가족 측 설명이다. 김 씨 가족이 보관한 증서에는 1946년 3월 5일 일본 돈 1만 2,220엔을 보관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현금보관증에는 당시 조흥은행 풍천지점장이 돈을 받아 보관한다는 취지의 내용과 조흥은행 직인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김주식 씨는 이후 맡긴 돈을 돌려받기 위해 은행을 찾았지만, 이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 유족의 주장이다. 가족 측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관련 자료가 사라지는 등 당시 금융 환경의 혼란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 과정에 대한 은행 기록은 공개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상태다.
결국 김주식 씨는 돈을 돌려받지 못한 채 1969년 세상을 떠났다. 이후 보관증은 창고에 남아 있다가 1982년 다시 발견됐고, 자녀 김규정 씨가 문제 해결에 나섰다. 김 씨는 1980년대 초 조흥은행 관계자로부터 증서가 은행에서 발급된 것이 맞다는 취지의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가족은 이후 금융당국과 은행 등에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지난 2022년에는 고령이 된 김규정 씨를 대신해 그의 딸이 금융감독원과 신한은행 등에 민원을 제기한 사실도 알려졌다. 당시 신한은행은 은행 직인과 지점장 이름, 계좌 등 관련 자료를 조사했지만, 현금보관증의 진위를 확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내놨다. 은행 측은 오래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현 단계에서는 도움을 줄 방법이 없다고 덧붙였다.
이 사건에서 특히 주의할 부분은 ‘100억 원’이라는 금액이다. 지난 2022년 보도에서는 1946년에 1만 2,220엔을 당시 환율과 물가, 화폐제도 변화 등을 고려하면 수십억 원 규모로 볼 수 있다는 추산이 소개됐다. 더하여 장기간의 이자까지 적용하면 100억 원을 넘을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그러나 80년 전 엔화의 구매력을 현재 원화로 환산하는 방식에는 기준에 따라 큰 차이가 발생한다. 적용해야 할 이자율과 예금의 법적 성격도 확정되지 않은 만큼 100억 원을 현재의 확정 채권액으로 보는 것은 어렵다.
한편, 김주식 씨가 돈을 맡겼던 조흥은행은 단순히 1943년에 처음 만들어진 은행으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국가기록원 자료에 따르면 조흥은행의 뿌리는 1897년 설립된 한성은행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후 1943년 한성은행과 동일은행의 합병을 통해 조흥은행이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신한금융그룹 내에서 신한은행과 조흥은행의 통합이 추진됐고, 금융감독위원회는 2006년 3월 양사의 합병을 인가했다.

최종적인 합병은 2006년 4월 1일 이뤄졌다. 당시 금융당국이 인가한 합병 구조에서는 조흥은행이 존속 법인이 되고 기존 신한은행이 소멸하는 방식을 택했다. 존속한 조흥은행 법인의 상호를 ‘신한은행’으로 변경하면서 현재의 통합 신한은행이 출범했다.
현금보관증이 작성된 시기는 현재로부터 약 80년이 지난 시점이다. 가족이 실제 돈을 돌려받을 수 있는지는 문서의 진위와 당시 거래의 실재 여부, 법률관계 등을 확인해야 판단할 수 있는 문제다. 공개된 자료만으로는 어느 한쪽의 주장이 최종적으로 입증됐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1946년 1만 2,220엔이 적힌 현금보관증이 세대를 거쳐 전해졌다는 점이다. 더하여 가족이 이를 근거로 지급을 요구했지만, 은행에서는 진위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답변을 내놨다는 사실 뿐이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