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국적 무함마드 깐수
외교관 생활 접고 북한으로 귀화
분단 체체 관통한 천재 평가 이어져

한때 위장 간첩 신분이 알려져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었던 일명 ‘무함마드 깐수’로 불렸던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전 단국대 교수)의 근황이 전해져서 화제다. 지난 25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에 따르면 정수일 소장은 향년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확인됐다.
정수일 소장은 분단과 냉전의 격랑을 온몸으로 관통했던 지식인으로 통한다. 지난 1934년 중국 연변에서 태어나 베이징대를 졸업한 정수일 소장은 중국 국비유학생 1호로 선발돼 이집트 카이로대학에서 공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어 모로코 주재 중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1963년 4월 고인은 ‘조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북한행을 선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당시 중국 외교부장이 촉망받던 인재의 북한행을 극구 만류했으나, 정수일 소장은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편지를 보내 북한행을 승인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대해 정수일 소장은 지난 2011년 출간한 회고록 <시대인, 소명을 따르다>를 통해 “이역 중국에서 살아가는 30년간 나는 한시도 내가 당당한 단군의 후예인 조선인이라는 점을 잊어본 적이 없었으며, 결국 조국에 돌아가 헌신하고야 말겠다는 심지를 줄곧 굳혀왔다”라면서 “(조국으로 돌아간 것은) 지성인으로서 시대와 역사 앞에 지닌 민족적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였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북한행을 통한 정수일 소장은 북한 내에서 평양 국제관계 대학, 평양외국어대학에서 교수를 지낸 뒤 1974년 대남 특수공작원으로 선발된 것으로 파악됐다. 이에 튀니지대학 사회 경제연구소 연구원, 말레이대학 이슬람 아카데미 교수 신분으로 해외에서 활동하다 1984년 무함마드 깐수라는 이름의 아랍계 필리핀인으로 신분을 위장해 한국에 입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에 들어온 그는 지난 1988년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해 1990년 신라와 아랍·이슬람 제국 관계사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박사학위 수여 이후 그는 단국대 초빙교수를 지내며 활발한 저술과 대외 활동을 하며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지난 1996년 7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검거돼 재판 과정에서 그가 ‘무함마드 깐수’가 아니라 북한 간첩 정수일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한국 사회를 큰 충격에 빠트리기도 했다. 간첩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정수일 소장은 1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으나, 지난 2000년 광복절 특사로 출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그는 전향을 선택한 뒤 사면·복권됐다. 2003년 한국 국적을 얻은 정수일 소장은 학문의 길에 집중한 그는 ‘실크로드 학’을 정립해 석학으로 인정받아 명성을 떨쳤다. 특히 그는 아랍어, 페르시아어,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타갈로그어, 말레이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독일어, 스페인어, 영어 등 12개 언어에 능통했던 고인은 문명 교류 학과 실크로드 학의 세계적 권위자로 인정받아 ‘스파이 사상 최고 엘리트’로 통했다.
실제로 정수일 소장은 <신라·서역교류사>, <기초 아랍어>, <실크로드 학>, <고대문명교류사>, <문명의 루트 실크로드>, <문명교류사 연구>, <이슬람문명>,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실크로드 문명기행: 오아시스로 편>, <문명담론과 문명교류>, <실크로드 사전> 등 여러 권의 책을 집필했다. 또한, 그가 12개 외국어를 구사하며 27편의 연구 책자를 저술할 정도로 세계 스파이사에서 최고의 전문 엘리트 간첩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에 따라 그는 지난 2008년 한국문명교류연구소를 설립해 현재까지 연구소장으로 활동해 왔다. 더하여 그의 수업을 들은 학생들에 따르면 정수일 소장은 “된장국까지 좋아할 정도로 한국을 사랑하시는 사람”으로 통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어 그의 성품에 대해서도 “성격이 밝고 쾌활해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외국인 선생님이었다”라는 평가가 이어졌다.
한편, 무함마드 깐수가 간첩이라는 사실은 당시 안기부가 팩스로 중국 내 북한 공작 거점에 보고되고 있다는 단서를 확보하고 호텔 측의 협조를 얻어 시내 각 호텔 근처에 CCTV를 설치해 추적하면서 알려졌다.
당시 그는 플라자호텔에서 팩스를 발송하려다 안기부에 적발됐다. 최근까지 그의 전향 여부에 대해 많은 논란이 지속되고 있었으나, 그가 별세하면서 논란도 함께 잠재워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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