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표 고무신 국제그룹
現 프로스펙스 신발 모태
전두환 한마디에 공중분해
정미소를 경영하던 부모님의 아들로 태어나 고무신을 팔아 한때 재계 7위에 달하는 거대 기업집단을 만들어낸 이가 있다. 이는 국제그룹의 양정모 회장으로 당시 대한민국에서 손꼽는 재벌에 속하고 부·울·경 제1의 향토기업을 만든 회장님으로 불리며 높은 위상을 자랑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제그룹은 한순간에 몰락의 길로 걷게 된다.
고무신을 팔아 21개의 계열사를 거느리는 대기업을 만들기까지 30여 년을 그룹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으나, 양정모 회장은 결국 하루아침에 국제그룹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현재까지도 재계에서 논란이 되는 국제그룹은 왜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을까?
당초 국제그룹은 정미소를 경영하던 아버지 밑에 태어나 부산에 국제고무라는 회사를 설립해 왕자표 고무신 제조 사업을 모태로 둔다. 당시 양정모 회장이 팔던 왕자표 고무신은 높은 품질로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며 큰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1960년 왕자표 고무신을 만들던 제조공장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해 직원 62명이 숨지고 39명이 다치는 등 대참사가 벌어지며 국제그룹은 시작도 하지 못한 채 망할 위기에 처했다. 다만, 이 당시 양정모 회장이 내렸던 결단이 그를 재계 7위의 회장님으로 만들었다.
양정모 회장은 화재로 인해 고무신 공장 가동에 제동이 걸렸을 당시, 고무신 대신에 운동화를 제작하기로 마음을 먹으며 사명을 국제화학으로 변경했다. 이는 산업화와 더불어 국민소득이 본격적으로 늘기 시작하며 사람들이 고무신보다는 운동화를 선호하는 분위기를 빠르게 눈치챈 양정모 회장의 ‘한 수’라고 볼 수 있다.
양정모 회장이 만든 왕자표 운동화는 고무신과 똑같이 높은 품질과 저렴한 가격을 앞세워 불티나게 팔렸다. 이어 마라톤 전문지에서 국내 최초로 미국에 수출된 운동화로 소개되는 등 수출도 시작했다. 국제화학은 왕자표 운동화의 인기에 힘입어 1973년 사명을 국제상사로 변경한 이후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으며, 2년 뒤 정부로부터 ‘종합 무역상사’로 지정됐다.
이후 국제상사는 인실 제강, 조광무역, 연합철강 등의 기업을 계속해서 인수하고 건설업, 호텔업에도 진출하는 등 공격적으로 몸집을 불려 나가며 그룹을 키워나갔다. 그룹의 규모가 본격적으로 커진 1980년대에 들어서며 양정모 회장은 또 한 번 놀라운 ‘한 수’를 던지게 된다.
바로 당시 관심이 높아지고 있던 아디다스, 나이키 등 브랜드 운동화에 혜안을 보인 것이다. 19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스포츠용품에 대한 수요가 높아질 것을 예상한 양정모 회장은 1981년 한때 나이키와 어깨를 나란히 한 국내 스포츠 브랜드 ‘프로스펙스’를 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프로스펙스는 미국 월간지인 ‘러너스 월드’로부터 미국 6대 스포츠화로 선정될 정도로 품질도 인정받는 등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큰 인기를 보이며 위상을 높여갔다. 다만, 이런 국제그룹의 부흥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80년대 초반 21개 계열사를 거느리며 재계 7위에 입성한 국제그룹은 1985년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몰락을 맞게 된다. 이는 1985년 국제그룹의 주거래은행이던 제일은행이 “국제그룹이 부실기업으로 판명돼 그룹 전체를 정리하기로 했다”라고 공표하며 전두환 정부의 부실기업 정리 대상으로 선정된 것이다. 제일은행 측은 국제그룹을 부실기업으로 분류한 이유에 대해 용산 사옥 신축으로 인한 자금난, 건설업 적자 등을 이유로 들었다.
다만, 업계에서는 실제론 양정모 회장이 전두환 정권에게 밉보여서 그룹이 해체됐다는 중론이 제기됐다. 재계에 따르면 당시 전두환 정부는 여러 재단을 설립해 국내 대기업 회장을 한자리에 모아두고 자금 출연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양정모 회장이 다른 대기업 총수들이 몇십억 원의 헌납금을 낸 것과 달리 5억 원의 헌납금을 내며 전두환의 미움을 산 것으로 추측된 것이다.
이어 전두환 대통령이 부산 유세를 위해 부산 기업인인 양정모 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하필 전두환 대통령의 유세 날이 양정모 회장의 막내아들 49재와 겹쳐 아들 제사를 위해 양정모 회장이 현장을 일찍 빠져나간 점이 전두환의 심기를 건드렸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실제로 전두환은 재선에 성공한 뒤 제일은행에 국제그룹에 발행된 어음을 모두 부도 처리하라고 지시해 결국 국제그룹은 총선 이후 9일 만에 뿔뿔이 해체됐다. 이에 따라 국제그룹의 계열사 21곳은 뿔뿔이 흩어지며 양정모 회장은 그룹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양정모 회장은 “자고 일어나니 기업이 해체돼 있었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후 양정모 회장은 1987년 ‘국제그룹 복원 추진위원회’를 세워 1988년부터 정부를 상대로 국제그룹의 해체가 부당하다며 위헌 소송을 벌였다. 결국 1993년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 판정을 받아 1994년에 한일합섬을 상대로 국제상사를 돌려받고자 ‘주식 인도 청구반환 소송’을 냈으나, 양정모 회장이 1996년 대법원에서 패소 판결을 받으며 국제상사를 돌려받지 못했다.
또한, 1997년 외환 위기를 거치면서 결국 그룹 재건의 꿈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는 국제그룹의 계열사를 가져간 한일그룹, 극동그룹 등이 외환 위기로 파산 절차를 밟았기 때문이다. 한편, 양정모 회장은 지난 1998년 부산도시가스 사외이사 추대 이후 고향인 부산에서 생활하다가 지난 2009년 서울대학교 병원 중환자실에서 노환에 따른 폐렴으로 그룹 재건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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