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노름판·술자리 ‘한량’ 생활
대구 삼성상회 사업 성공
대한민국 근현대 경제·산업 역사에 한 획을 그은 1세대 재벌이 있다. 현재 국내 굴지의 대기업 1위 자리를 달리고 있는 삼성그룹은 이병철 회장의 손에서 탄생했다. 건실한 기업을 만들어낸 그가 과거 노름판과 술자리를 전전하는, 이른바 ‘한량’ 생활을 한 적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량의 삶에서 국내 1세대 재벌이 된 그는 어떻게 삼성 제국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당초 이병철 회장은 서당에서 공부를 시작했다가 곧 싫증을 느껴 지수보통학교로 입학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수보통학교에 다니던 중 부모님을 졸라 11살에 수송학교에 입학한 그는 공부에는 큰 관심이 없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의 학업성적은 50명 학급에서 35~40등 수준이었으나 산술만은 늘 상위를 차지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어 이병철 회장은 16살 때인 1926년 박두을씨와 결혼했고,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에 입학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병철 회장의 유학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와세다 대학에 다닌 당시 그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며 입학을 여러 번 했으나 졸업하지 못하는 상황에 다다르며 대학을 1년밖에 다니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귀국을 결정한 이병철 회장은 서울에서 노름판과 술자리를 전전하는 ‘한량’ 생활을 한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그의 집안은 부잣집에 속할 정도로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왔으나 식민지 청년이 펼칠 수 있는 꿈은 없었다. 이에 좌절한 이병철 회장은 인생 목표도 없이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도박에도 손을 대는 등의 생활을 이어 나갔다.
한량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그를 보고 동네 사람들이 “문산 선생의 손자가 이래서야. 쯧쯧!” 하며 혀를 찼다. 여기서 문산 선생은 지역 명사인 할아버지의 호를 말한다. 실제로 그는 회고록을 통해 고향에서 특별히 할 일이 없어 친구들과 노름에 빠졌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밤새 노름에 빠져 달그림자를 밟으며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고 회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노름판을 전전하는 생활을 이어가던 중 이병철 회장은 노름하다 집으로 돌아와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에 대해 “그야말로 허송세월이었다. 어서 빨리 뜻을 세워야 한다”라는 회한과 두려움을 느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할 결심을 한 것은 1936년이었다. 이병철 회장은 과거 일본 유학 당시 받았던 굴욕감과 수치심을 기억하고 사업보국으로 반드시 풍족하고 강한 독립 국가를 이룩하겠다고 굳게 다짐했던 기억을 상기했다.
이에 부친에게 사업을 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300석의 재산을 타내 마산으로 가서 친구 두 명과 함께 1936년 협동정미소를 차리게 된다. 다만, 극심한 불황 시기였던 탓에 곡물을 확보하기 위해 인천 곡물 거래소 매매에 손을 댔다가 큰 손해를 보는 등 난항을 겪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 여파로 정미소와 자산을 모두 잃게 되며 첫 사업을 실패하게 된다. 정미소 사업 실패 이후 그는 대구 수동에 무역회사인 삼성상회를 열고 재기에 성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상회는 인근의 사과와 동해의 수산물 등을 만주에 내다 파는 곳이었다.
삼성상회로 재기에 성공한 그는 해방 뒤 여기서 서울에서 삼성물산을 열었고, 6·25전쟁 당시 전 재산을 날리는 등 몇 번의 고비가 있었지만, 제일제당, 제일합섬 등을 성공시키며 사업을 순조롭게 키워나간 것으로 확인됐다.
한편, 삼성그룹은 이병철 회장과 조홍제 효성그룹 회장이 동업해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어릴 적부터 친분이 있던 이병철 회장과 조홍제 회장은 1949년 서울 종로2가에 설립한 삼성물산공사의 동업자가 된 것이다.
이에 조홍제는 이병철에게 두 달 전에 빌려줬던 800만 원에 200만 원을 추가한 1,000만 원을 삼성물산에 투자함으로써 부사장이 됐다. 다만, 1953년에 설립한 제일제당의 설립 및 경영에 진력했지만, 이병철과 지분 문제로 갈등을 빚어 1962년 9월에 삼성그룹과 결별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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