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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팔렸는데…” 소주 1위 기업이 결국 무너진 진짜 이유

이시현 기자 조회수  

출처:KBS 보도화면 갈무리

한때 국내 소주 시장을 장악했던 진로는 1997년 진로그룹의 심각한 자금난과 함께 부도 사태를 맞으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얼핏 보면 소주 사업이 흔들리면서 회사까지 무너진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 상황은 정반대에 가까웠다. 자금난이 심각해진 와중에도 진로 소주는 판매량이 늘었고 공장은 출하량을 확대할 정도였다. 잘나가던 소주 회사가 무너진 결정적인 배경에는 본업이 아닌 곳으로 몸집을 키우면서 쌓인 부채와 부실 계열사가 있었다.

진로의 역사는 1924년 장학엽 창업주가 평안남도 용강에서 진천양조상회를 세우면서 시작됐다. 한국전쟁 이후 남쪽으로 내려와 사업을 이어간 장 창업주는 1954년 서울 영등포에 서광주조를 설립했다. 이후 진로는 친숙한 두꺼비 상표를 앞세워 소주 시장에서 빠르게 이름을 알렸다.

처음부터 독보적인 회사였던 것은 아니다. 1960년대에는 삼학소주 등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이후 진로가 전국적인 브랜드로 성장하면서 판도가 달라졌고 소주는 회사를 키우는 핵심 사업이 됐다.

변화가 찾아온 것은 진로가 소주 회사에서 거대한 그룹으로 몸집을 불리면서부터였다. 장학엽 창업주의 차남인 장진호 전 회장은 1988년 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이후 사업 영역은 건설과 유통, 전선, 제약, 금융, 방송 등으로 빠르게 넓어졌다. 1997년에는 계열사가 24개에 이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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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몸집이 커지는 속도를 재무구조가 감당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계열사들의 실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서 그룹의 자금 부담이 커졌고 결국 핵심인 주류 사업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황으로 번졌다.

출처:하이트진로그룹

그런데 당시 소비자들은 여전히 진로 소주를 찾고 있었다. 실제로 1997년 진로소주와 참나무통 맑은소주 등의 판매 증가로 진로의 월 매출은 전월보다 20% 이상 늘어난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이천공장에서는 하루 평균 소주 출하량을 기존 300만 병에서 350만 병으로 확대하고 24시간 공장을 가동하기도 했다.

소주가 안 팔려 회사가 무너졌다는 설명만으로는 당시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다. 진로그룹의 위기는 잘 팔리던 핵심 상품보다 그 바깥에서 먼저 커지고 있었다.

결국 1997년 4월 자금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당시 재계 19위였던 진로그룹은 심각한 자금난에 빠지면서 부도방지협약의 첫 적용 대상이 됐다. 채권단은 진로 등 6개 계열사의 채권 행사를 유예하고 자금 지원과 구조조정을 통한 정상화를 추진했다.

살아남기 위해 진로도 자산을 처분하려 했다. 서울 양재동 화물터미널 부지와 서초동 부지 등을 매각해 자금을 확보하는 방안이 추진됐다. 계열사를 대폭 정리하고 주류 사업을 중심으로 그룹을 다시 꾸리는 방안도 거론됐다. 그러나 부동산 경기 부진 등으로 자산 매각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으면서 자금 확보에 차질이 생겼다.

시간을 벌어준다고 근본적인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금융권의 상환 압박까지 계속되면서 진로그룹은 다시 벼랑 끝으로 몰렸다. 결국 같은 해 9월 진로는 돌아온 어음을 결제하지 못하면서 최종 부도 처리됐다.

그룹이 무너졌다고 진로 소주까지 곧바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후의 과정은 진로그룹의 위기와 진로라는 브랜드의 경쟁력이 서로 다른 문제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회생 과정에서 계열 사업들은 하나씩 주인을 달리하게 됐다. 1999년 진로쿠어스맥주는 오비맥주에 매각됐고 위스키 사업 역시 이후 진로에서 분리됐다. 진로는 경영 정상화를 시도했지만 결국 2003년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한때 20개가 넘는 계열사를 거느렸던 진로그룹은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았다.

출처:하이트진로그룹

경영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도 뒤늦게 법정에서 다뤄졌다. 장진호 전 회장은 분식회계와 계열사 부당지원, 사기대출 등과 관련해 재판을 받았다. 그룹이 무리하게 사업을 확대하는 동안 취약해진 재무구조와 경영 문제가 부도 이후까지 이어진 셈이다.

반전은 소주 사업에서 나왔다. 법정관리 상태였던 진로를 2005년 하이트맥주가 인수했다. 맥주를 주력으로 하던 하이트와 국내 대표 소주 업체였던 진로가 한 울타리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후 두 회사는 2011년 합병하면서 현재의 하이트진로가 출범했다.

결국 사라진 것은 ‘진로’라는 소주가 아니라 진로그룹이었다. 진로그룹이 부도에 이르는 동안에도 소주는 팔리고 있었고 회사의 주인이 바뀐 뒤에도 진로라는 이름은 살아남았다. 1997년의 몰락을 단순히 외환위기나 소주 판매 부진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진로의 사례에서 눈에 띄는 지점은 가장 잘하던 사업이 실패해서 무너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소주를 기반으로 성장한 회사가 본업 밖으로 빠르게 영역을 넓혔고 이를 감당하는 과정에서 계열사와 재무 부담이 커졌다. 결국 그룹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출발점이었던 소주는 살아남았다. 한때 진로그룹을 키웠던 ‘진로’가 100년을 넘긴 지금도 하이트진로의 대표 브랜드로 남아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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