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건설 고령교 복구 공사
화폐개혁으로 인한 물가 상승
정주영 일가 집 4채 팔아 도움
쌀가게 직원으로 시작해 대한민국의 1세대 기업으로 꼽히는 현대그룹을 일궈낸 정주영 창업 회장은 과거 ‘쫄딱’ 망할뻔한 위기에 빠진 적이 있다. 이는 정주영 회장이 원자잿값 폭등과 정부의 화폐개혁으로 천정부지 치솟은 물가로 인해 재정이 바닥나 회사가 망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정주영 회장이 “일생의 악몽이었다”라고 말한 해당 사건은 현재까지도 종종 거론되고 있는 현대건설의 고령교 복구 공사다.
한국을 대표하는 건설회사인 현대건설은 지난 1947년 서울 중구 초동 현대자동차공업사 건물에 현대토건 간판 하나로 시작했다. 당시 정주영 회장은 자동차 수리 대금을 받기 위해 관청에 갔다가 자신보다 10배가 넘는 돈을 받아 가는 건설업자를 보고 건설사 창업을 마음먹은 것으로 알려졌다.
얼마 뒤 한국전쟁이 터지자, 정주영과 그의 가족들은 부산으로 피난을 가야만 했다. 당시 영어를 하던 동생 정인영이 미 8군의 통영 장교로 복무하며 건설회사를 찾던 미군에게 자기 형이 건설업을 했었다며 정주영을 추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정주영 회장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미 8군의 공사를 도맡아 하듯 따내면서 현대토건의 기반을 닦았다.
결국 약 80명의 직원을 거느리게 된 정주영 회장은 은 1952년 동래 한국조폐공사 사무실 건설을 수주하며 정부에 신뢰를 얻게 된다. 업계에 따르면 당시 한국조폐공사 사무실 건설은 누가 봐도 적자가 예상되는 사업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여기에 1953년 정부가 화폐개혁을 단행하면서 물가 역시 극심하게 상승한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정주영 회장은 포기하지 않고 해당 공사를 진행하게 된다. 이때 얻은 정부의 신뢰로 인해 1953년 정주영 회장은 역사적인 공사를 수주하게 된다. 이는 공사시한 24개월. 계약금 5,478만 환의 당시 정부 발주 공사 중 최대 규모의 공사인 고령교 공사를 입찰에서 따낸 것이다.
당초 고령교는 1950년 8월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폭파했던 다리로, 6ㆍ25전쟁의 영향으로 파괴된 바 있다. “이봐, 해봤어?”라는 말로도 유명한 정주영 회장은 호기롭게 의욕을 가지고 사업을 시작했으나 고령교 공사는 정주영 회장의 일생에 악몽으로 남게 됐다. 이는 사업 자체가 복구 공사 수준이 아닌 교각이 기초만 남고 상부 구조물이 바닥에 가라앉아 신축공사와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현대토건은 그간 막사나 창고를 짓는 공사를 주로 해 다리같이 난도가 있는 공사를 맡아본 경험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주영 회장의 결단대로 공사를 시작했으나, 장마로 불어난 물고 빠른 물살 때문에 착공한 지 1년이 지난 시점에도 교각하나 만들지 못했다.
당시 현대토건의 경우 장비도 부족하고 기술이나 노하우도 부족해 인부들이 원시적인 방법을 이용해 교각을 세우려 했으나 이마저도 홍수에 쓸려가며 공사는 속도를 내지 못했다.
더하여 같은 시기 정부의 화폐개혁으로 천정부지 치솟은 물가 때문에 착공 당시 700환으로 책정된 기름 단가가 공사 중 2,300환까지 올라버리게 된다. 즉, 공사를 통해 벌어들이는 수익은 뒤로 하고 완공 전에 적자가 예상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이어 동래 조폐공사 사무실이 완공됐지만 7,000만 환의 어마어마한 적자를 남기며 그간 미군 공사로 번 돈을 조폐공사 사무실 건설에 쏟아부어 재정이 바닥나게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고령교 공사 중 막대한 물가 상승으로 인해 건자잿값과 노임 비가 120배나 상승해 버리면서 사무실엔 빚쟁이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에 정주영 회장은 가족과 친인척을 모아놓고 “회사가 힘드니 집을 팔아야겠다”고 밝혔다. 다만, 그의 가족들은 “차례는 지내야 하니 형님 집은 놔두시고 우리 집을 팔겠다‘며 총 4채의 집을 처분한 것으로 확인됐다. 결국 집을 판 돈에 회사 자본금을 합쳐 1억 환을 만든 정주영은 해당 공사를 성공하게 된다.
1955년 현대토건은 당초 계약기간보다 2달을 넘겨 공사를 완료하게 된다. 다만, 계약금 5,478만 환으로 시작했던 공사에 총 1억 2,000만 환이라는 막대한 재정이 투입되며 6,500만 환의 적자를 기록했다. 해당 적자 금액을 상환하기 위해 현대그룹은 20여 년의 시간을 투입해야 했다.
한편, 훗날 정주영 회장은 고령교 공사에 대해 자신의 자서전인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를 통해 “나의 인생에서 가장 혹독했던 시기였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에 재계에서는 그를 두고 ‘위기의 승부사’라는 평을 내놓기도 했다.
이는 그가 위기의 순간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해결 방법을 모색해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능력을 입증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또한, 정주영의 가족 역시 위기의 순간 선뜻 자신들의 집을 내놓으며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명실상부한 현대가’라는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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