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태그룹 흥망성쇠
경영권 갈등 분쟁화
어음 196억 처리 못 해
한때 롯데제과와 함께 국내 제과 사업의 양대 산맥으로 불렸던 해태그룹은 재계 순위 24위에 오르며 15개의 계열사를 거느릴 정도의 큰 규모를 자랑했다. 특히 해태그룹은 충직하고 옳고 그름을 능히 구별할 줄 아는 상상의 동물 ‘해태’의 이름을 따서 사명을 사용했으며, 그룹의 전성기라고 볼 수 있는 시기에는 2조 7,000억 원의 매출을 기록하는 재벌그룹에 속했다.
실제로 롯데제과와 top 2로 경쟁하던 대형 제과 업체인 해태제과로 시장 인지도를 높였고 1980~1990년대 KBO 리그의 절대 강자였던 해태 타이거즈 등으로도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그렇다면 한때 국내 제과시장의 양대 산맥으로 꼽혔던 해태그룹은 왜 망했을까?
해태그룹의 모태가 되는 해태제과 합명회사의 창업주인 박병규 씨는 광복 전까지 일본인이 운영하던 나가오카 제과(영감 제과)의 경리 직원으로 근무했다. 광복 직후 박병규 창업주는 용산 남영동 공장을 민후식, 신덕발, 한달성 3명과 공동으로 불하받아 해태제과 합명회사로 이름을 지었다.
이후 1958년 해태산업을 세워 사세 확장을 시작해 지난 1973년 해태 식품을 세워 음료 사업에도 진출했다. 해태그룹의 성장에는 호남 사람들의 열렬한 애향심이 도움을 주었다. 해태그룹은 애향심을 바탕으로 전라도 시장을 완전히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60년대 이후 호남 사람들이 대거 서울로 상경하면서 서울과 인천 등 수도권에서도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했다.
당시 호남 사람들이 많이 살던 서울 변두리 지역 슈퍼마켓에는 100% 해태제과 제품만 취급하고, 롯데, 빙그레, 크라운 등 다른 회사 과자는 아예 팔지 않는 가게도 적지 않았을 정도였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또한, 1973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업다각화에 나서 농어촌 개발 공사로부터 한국 산토리, 감귤 냉장 판매, 메도 골드코리아까지 인수했으며 이후 1978년 해태관광, 1978년 해태상사, 1979년 신방 전자, 1982년 코스코, 1986년 무궁화 식품 등을 각각 인수/설립한 것으로 전해졌다.
해태그룹은 당초 1980년대 초반까지는 거의 식품 위주로만 사업을 확장해 왔다. 이같이 해태제과가 공격적으로 사업다각화를 진행한 이유는 제과 시장이 과열됐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는 해태그룹과 함께 제과 시장을 장악했던 롯데제과가 국내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재계에 따르면 일본에서 제과 사업을 하던 고 신격호 명예회장은 1967년 국내에 롯데제과를 세웠는데, 1972년까지 껌 시장을 선점했던 해태제과는 롯데제과에 1위를 넘겨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해태그룹은 1983년 사우디아라비아의 기업 바툭과 현지 법인을 설립해 해외시장 개척에 힘썼으며, 1984년 광주에 공장을 완공하며 사세를 넓히는 방안을 택했다.
이후 1987년 해태제과(주)로 이름을 변경해 1997년까지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태그룹은 활발한 인수합병을 통해 1996년 말 기준 재계 24위에 오르기도 했다. 다만, 박병규 회장이 1977년 급서하자 공동 창업주들 간에 경영권 분쟁이 생기며 그룹 몰락의 전초가 됐다.
박병규 회장의 사망 직후 상무로 승진한 장남 박건배가 사실상 경영권을 잡았으며, 공동창업주 신덕발의 아들 신정차는 해태 관광을 들고 분가했다. 여기에 민후식 공동창업자의 아들 민병헌 역시 해태유업을 들고 독립했다. 이에 따라 박건배 회장 체제의 해태그룹은 1996년 말 기준 자산 3조 3,900억 원, 매출액 2조 7,100억 원을 기록했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박건배 회장이 1986년 그룹 발전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며 식료품업의 비중을 줄이며 사업다각화를 진행한 것을 두고 그룹의 몰락을 이끈 주범이라는 평가를 내놓았다. 당초 해태그룹은 1990년까지 1조 5,000억 원의 그룹 매출 달성을 목표로 하며 주력 사업인 식품 분야를 수익성 위주로 경영하고, 전자 등 비식품 분야는 지속적인 확대 성장을 도모한다고 밝혔다.
이후 1990년에는 식품과 비식품의 매출 비중을 50대 50으로 만들고 그룹 발전 5개년이 끝난 이후 비식품에 치중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이에 따라 박건배 회장은 1988년 신방 전자를 해태전자로 이름을 바꿨고, 1994년 12월 기술, 유통망 등이 경쟁사 등에 밀린다는 이유로 전문 오디오업체인 인켈을 인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전화기 전문 제조업체 나우정밀을 인수해 인켈과 합병하며 전자 그룹으로의 도약을 꿈꾸기도 했다. 이보다 앞서 인수했던 미진공업사를 1997년 해태중공업으로 사명을 바꾸며 중공업에도 진출하려 한 해태그룹은 사실상 전자와 중공업 부문에서 지속적인 적자가 발생해 부채가 많이 증가했다. 이에 따라 결국 해태그룹은 해태전자, 해태중공업의 빚을 감당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1997년 8월 22일 어음 200억 원을 결제하지 못하며 부도 위기를 맞은 해태그룹을 두고 조흥은행이 자금을 지원해 부도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으나 만기 된 어음 196억 원을 처리하지 못해 해태제과 등 3개 계열사가 부도 처리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상황에 전자, 중공업 관련 대부분의 계열사는 정리됐으며, 식품 관련 계열사는 대부분 해태제과에 합병된 후 2001년 외국 UBS 컨소시엄에 매각되기도 했다. 해태제과는 지난 2005년 크라운제과가 인수해 현재의 해태제과식품으로 거듭났다.
한편, 해태그룹의 몰락을 두고 재계에서는 “2세 경영의 방만함이 나온 결과다”라는 평가가 제기됐다. 이는 경영의 불안정성으로 인해 높은 부채를 기록하며 결국 그룹을 몰락의 길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다만, 브랜딩이 잘 된 해태그룹의 제품은 현재까지도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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