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 그룹 강석진 창업주
1970년대 7년 연속 수출 1위
“내가 왜 악덕 기업인이란 말인가?”
1970년~1980년대는 그야말로 1세대 재벌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시기였다. 당시 국내 경제를 이끌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산업과 함께 발전을 이끌어온 1세대 재벌 중 한때 재계 1위를 기록할 정도로 사업이 성공했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무너져버린 기업이 있다. 바로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해체된 동명 그룹이다.
동명 그룹은 지난 1920년 초등학교만 졸업한 15세 청년은 가난이 싫어 무일푼으로 부산에 가서 5년 동안 목공 일을 배우며 시작됐다. 당시 뛰어난 손재주 덕에 5년 만에 부산을 대표하는 목공 수로 자리 잡은 강석진은 그간 목공 일을 통해 벌어들인 수입으로 1925년 동명목재를 설립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미 뛰어난 목공 수로 소문이 난 덕분인지 사업은 번창했고, 40년 만에 재계 1위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다만, 동명 그룹의 신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는 동명 그룹이 신군부 세력에 의해 해체된 기업 1호가 됐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명 그룹 신화는 왜 정치에 의해 몰락해야 했을까?
강석진 창업주는 동명 그룹의 모태가 되는 동명제재소를 10평 남짓한 공간에 열어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부산 내에서는 강석진 창업주의 제재소를 두고 품질 좋은 목재로 튼튼한 가구를 만드는 곳이라며 입소문을 탔다. 이후 사업을 하며 번 돈으로 부산 동구 범일동에 2,000여 평 용지를 매입해 생산시설을 갖춘 그는 1949년 동명목재상사로 사명을 변경한 후 합판 생산 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시에는 원목 공급이 힘들어 제재 과정에서 생긴 나무토막과 자투리를 모아 합판으로 만들어 원가를 절감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 따르면 동명 그룹의 성장 신화의 본격적인 시작은 한국전쟁을 겪은 뒤로 확인됐다. 이는 전쟁 기간 파괴된 시설 복구에 모든 이목이 쏠렸기 때문이다.
강석진 창업주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동명 그룹은 합판과 목재 주문을 받아 200명 전 직원이 밤낮없이 생산에 매달린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높은 수요를 따라갈 수 있는 생산시설의 부족을 느껴야만 했다. 이에 강석진 창업주는 대량생산을 위해 1960년 남구 용당동 바닷가 근처 200만 ㎡용지를 매입해 공장과 생산설비를 이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요에 따른 생산량을 감당할 수 있게 된 동명 그룹은 지속해서 품질 좋은 제품을 생산한 덕에 인기가 더욱 높아졌다.
또한, 이 시기 정부의 경제개발 1차 5개년 계획과 겹치며 동명목재상사의 합판은 불티나게 팔리며 높은 이익을 거뒀다. 이어 당시 미국이 동명목재상사 합판을 수입하고 싶다고 밝힘에 따라 동명 그룹은 자연스럽게 수출까지 따내게 됐다.
이같이 여러 호재가 동명 그룹에 작용하자 1965년 동명목재상사는 재계 1위에 오르며 위상을 떨친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 1위에 오른 뒤 동명 그룹의 앞날에는 승승장구만 기다리고 있었다. 실제로 1970년대에 들어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중국까지 시장을 넓혀가 7년 연속 수출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지난 1978년엔 매출 1,000억 원을 기록하는 기염을 통했다.
그룹의 실적이 높아지자, 동명목재상사는 1974년 동명 산업을 시작으로 동면 해운, 동명 개발, 동명중공업을 설립하고, 1979년 남진 식품을 인수해 동명 식품으로 사명을 바꿔 사업다각화에 나서며 그룹의 면모를 갖춘 것으로 확인됐다.
재계에 따르면 1974년 종합소득 랭킹으로 강석진 동명목재 회장이 1위를 차지했고, 조중훈 대한항공 회장이 2위를 차지했는데 이들 사이의 격차가 무려 3배 이상 수준인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로 강석진 회장은 당시 국내에 몇 대 없던 차종 중 하나인 벤츠 600을 타고 다니는 등 막대한 부를 자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승승장구할 것만 같던 앞날은 하루아침에 동명 그룹이 악덕 기업’으로 치부되면서 캄캄한 앞날로 변했다. 이는 강석진 회장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뒤 장남 강정남이 회사를 맡으며 시작된 것으로, 강정남 회장이 회사를 맡은 후 목재 사업의 부진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실적 부진의 원인은 당시 원목 가격이 상승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이와 더불어 앞서 사업다각화를 추진했던 것으로 인한 자금경색까지 동명 그룹을 옥죄기 시작했다. 결국, 1979년 125억 원의 적자를 기록한 동명 그룹은 창업주 강석진 회장의 복귀를 통해 경영 정상화 방안을 모색했으나 그룹의 몰락을 막을 수 없던 것으로 전해졌다.
재계에 따르면 동명 그룹의 위기가 찾아왔던 지난 1980년 동명목재상사는 매달 6억 원에 달하는 적자를 감당하지 못해 휴업을 결정하게 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따라 자금난 위기를 맞은 부도를 맞으며 동명 그룹은 해체됐다.
특히 그룹의 대들보로 꼽혔던 동명목재상사는 도산됐으며 동명 산업과 동명중공업은 여러 기업을 거쳐 각각 미국PPG 사와 두산그룹에 넘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이런 동명 그룹의 몰락을 두고 업계에서는 ‘경영 실패로 인한 몰락이 아닌 신군부에 의한 몰락이었다’라는 평가가 지배적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당시 안기부가 강석진 회장과 장남 강정남 씨 등을 부정 축재를 일삼는 반사회적 기업인으로 지목해 자산을 모조리 강탈했기 때문이다. 당시 강제로 헌납한 재산은 토지 317만 ㎡(95만8,925평)와 주식 700만 주 등 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로 동명 그룹이 자금난에 허덕이던 당시 동명 그룹이 주거래 은행인 제일은행과 만나 200억 원을 지원받기로 했으나, 이날 안기부에서 동명 그룹의 임원들을 납치하며 그룹을 살릴 수 있다는 희망은 절망으로 뒤바뀌었다.
이에 대해 당시 류필윤 동명 목재상사 전무는 “안기부에서 강석진 회장과 임원들을 15일 동안 감금해 외부와 소통이 단절돼 은행 거래를 할 수 없었고, 자산을 몰수당하며 부도로 이어졌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편, 동명 그룹의 창업주인 강석진 회장은 그룹이 몰락한 뒤 “내가 왜 악덕 기업인이란 말인가”라는 말을 남기고 1984년 화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지난 1997년 강정남 씨와 두 딸이 국가를 상대로 “강제 헌납 당한 토지를 되돌려달라”며 소송을 걸었지만 패소한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지난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신군부의 강압에 의해 동명 그룹이 강제 헌납 됐다”고 발표했다. 발표에 따라 동명 그룹의 몰락은 신군부의 강압에 의한 헌납이었음이 밝혀졌고, 강석진 회장의 명예는 회복됐으나 그의 억울함은 여전히 동명 그룹의 아픈 역사에 남아 있다. 당시 강제로 헌납한 재산은 토지 317만 ㎡(95만 8,925평)와 주식 700만 주 등이었다.
댓글4
두환이 얼굴봐라 관상학으로봐도 저것은 인간이 아니다
전두환은 사람 새끼가 아니지
발그니로
동명그룹 뿐이량 당시 사람들은 우리나라 잘 나가는 사업체를 갈갈이 흡입한 전두환은 광주 시민 학살 뿐 아니라 기업들에게도 강도 짓을 했다. 하지만 전두환 한사람만의 일이 아니고 그 권력을 힘입어서 그에 못지않게 빨아먹은 세력들이 사회 곳곳에서 아직도 힘을 쓰고 있으니 어찌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이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일제청산 뿐 아니라 이런 강도짓을 청산하는 것도 과제이다. 하지만 이런 총대를 누가 맬까?
전두환이가 범인이잖아!!! 도(盜)환이 이노무시키 때문에 재벌 여럿 날아갔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