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만에 리움 복귀
삼성 미술사업 재시동
삼성가 조용한 리더십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 회장의 배우자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이 약 8년 만에 미술계에 복귀했다. 삼성 문화 재단은 창립 60주년을 맞아 기획한 호암미술관 특별전 ‘겸재 정선’ 개막일인 지난 3월 31일, 홍 전 관장을 명예관장으로 추대했다고 밝혔다. 2017년 리움 관장직에서 물러난 이후 처음으로 공식 직함을 갖고 복귀한 셈이다.
홍 명예관장은 이날 전시 개막식과 만찬에도 참석해 관계자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는 “호암미술관과 간송미술관이 협력해 기획한 이번 전시는 우리나라 대표 사립미술관 간의 협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라며 “문화 보국을 실천한 호암 이병철 선생과 간송 전형필 선생은 문화유산을 대중과 향유하려 했던 선각자들”이라고 언급했다.

리움미술관은 2017년 홍 명예관장의 사임 이후 관장직이 공석인 상태였다. 대신 차녀인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이 2018년부터 운영위원장을 맡아 미술관 운영을 이어왔다. 이번 명예관장 추대는 사실상 리움 운영 전면에 다시 이름을 올린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홍 명예관장은 서울대학교 응용미술학과를 졸업한 뒤 1993년 호암미술관장, 2005년 현대미술관회장, 2011년 리움미술관장 등을 역임했다. 2010년을 제외하고 2005년부터 2014년까지 미술 월간지 및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가 선정한 ‘한국 미술계를 움직이는 인물’ 1위에 꾸준히 이름을 올렸다. 2015년에는 미국 미술 전문지 ‘아트뉴스’가 그를 “한국의 국내외 현대미술에 가장 인상적인 컬렉션을 보유한 인물”로 평가했다. 또한, 글로벌 미술 매체 ‘아트넷’이 선정한 세계 200대 수집가에도 이름을 올린 바 있다.

삼성가의 문화 예술 활동은 창업주 이병철 회장 시절부터 이어져 왔다. 이 회장은 1982년 30여 년간 수집한 미술품을 바탕으로 호암미술관을 개관했으며, 고(故) 이건희 회장은 2004년 리움 개관 당시 “문화유산을 모으고 보존하는 일은 인류 문화의 미래를 위한 시대적 의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부친이 수집한 문화재 중 2만 3,000여 점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기증했다.
업계 안팎에선 삼성의 문화예술 활동이 오너 일가의 지속적인 관심 아래 다시금 활발해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전시 개막식 만찬에서 그는 “성원에 감사드리고 더욱 열심히 하겠다”고 짧게 소회를 밝혔다.

재계에서는 오랜 시간 삼성가의 안주인으로 자리를 지켜온 홍 명예관장의 리더십에도 주목하고 있다. 그는 이병철 창업주의 막내며느리이자, 이건희 선대 회장의 배우자, 이재용 회장의 어머니로서 삼성가 3대에 걸쳐 조용한 내조로 힘을 실어 온 인물이다. 과거 미술 애호가였던 이병철 회장이 결혼 초기 매일 인사동에서 골동품을 사 오게 하며 안목을 길러주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후 리움미술관 설립과 운영, 이건희 컬렉션 기증 등 문화 사업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이건희 선대 회장과 홍라희 명예관장은 미술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많은 부분에서 공감대를 형성해 왔다. 고(故) 백남준 작가의 대표작 ‘다다익선’이 삼성전자의 후원 아래 TV 1,003대를 활용해 제작될 수 있었던 것도 이들 부부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평가다.
재계 한 관계자는 “홍 명예관장의 예술적 안목은 시아버지 이병철 회장에게서 길러졌고, 그 기반 위에 이건희 회장이 재정적으로 든든한 후원자 역할을 했다”라며 “이병철 회장은 작품의 가격이 지나치다고 판단되면 구매를 망설였지만, 이건희 회장은 명작이라 판단되면 가격을 따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홍 명예관장이 이끌던 리움미술관은 현대미술과 대중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해왔으며, 한국 미술이 세계 무대에 알려지는 데에도 홍 명예관장의 역할이 컸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배경 속에서 홍 명예관장이 다시 문화 사업 전면에 나섰다는 점은 상징성이 크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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