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발전의 상징, 경부고속도로
1970년 개통 당시 건설비 430억
지난해 말 장부가치 12조

국내 첫 고속도로는 1968년 완공된 경인고속도로와 1970년 경부고속도로로 알려져 있다.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 정부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시기인 1968년 2월 1일에 착공해 1970년 7월 7일 준공했다. 길이는 총 416km이고, 1968년 개통한 경인고속도로에 이어 한국의 두 번째 고속도로다.
첫 준공 시기에는 전 구간이 4차로로 건설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교통 수요가 증대하자 확장 필요성이 대두됐다. 이에 1992년 7월, 양재∼수원 간 구간 18.5㎞는 8차로로 확장됐다. 1993년 7월에는 수원∼청원 간 구간 100.1㎞가 6∼8차로로 늘었다. 2003년에는 구미∼동대구 간 구간 60.8km가 기존 4차로에서 8차로로 확장됐다.

경부고속도로는 서울과 부산을 각 종점으로 두며 경기도 수원, 오산, 충남 천안, 대전, 충북 영동, 경북 김천, 구미, 대구, 경남 울산, 양산 등 국내 주요 도시를 연결해 흔히 ‘국토의 대동맥’으로 불리기도 한다.
지금에야 경부고속도로에 대한 인식이 나아졌지만, 1967년 당시에는 건설 자체가 반대에 부딪혔다. 정부가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을 밝히자, 야권에서 이를 비판했기 때문이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물론 고 변형윤 서울대 명예교수를 비롯한 지식인들이 이를 반대했다. 이들은 당시 자동차 보급도 미진한 만큼 국토를 가로질러 도로를 내는 것은 “극소수 부자들의 유량길을 뚫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개발에서 소외된 호남을 중심으로 지역 차별이라는 비판도 불거졌다. 당시 한 교수의 논문에 의하면 정권 교체 전까지 영남과 호남의 예산 투자 액수가 10배 가까이 차이가 났을 정도다. 실제 1968년 경부고속도로와 같이 착공된 호남선 복선화 공사는 36년이 걸려 2004년에야 완공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당시의 비판을 이겨내고 1968년 2월 1일 경부고속도로 착공에 나섰다. 이후 1년 5개월 만에 이를 준공하면서 경제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은 그전까지 철도 중심이었던 수송 구조와 체계를 도로 위주로 재편하는 등의 변화를 불렀다. 또한, 해당 공사는 울산 정유공장 건설 이후 공급 과잉 상태에 놓인 아스팔트 처리에 큰 역할을 하며 경제를 부양했다.

당시 경부고속도로 건설비로 투입된 금액은 430억 원이었지만, 현재 이 고속도로의 가치는 지난해 말 기준 12조 원가량으로 불어났다. 정부가 8일 국무회의에서 의결한 ‘2024회계연도 국가 결산보고서’를 살펴보면,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고속도로의 장부가치는 12조 931억 원으로 나타났다. 이는 국유재산 가운데 가장 비싸게 책정된 금액이다.
해당 자료를 기준으로 경부고속도로의 장부가치는 당시 건설비에 비해 279배로 늘어났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할 당시 1970년 260달러였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지난해 3만 6,624달러로 140배 이상 불었다는 것을 감안해도 그 가치가 큰 폭으로 불었다.

다만, 해당 고속도로는 조급한 공사 진행으로 건설 과정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공사 도중 77명의 희생자가 발생했으며, 날림 공사로 인해 1990년대 초반까지 발생한 유지보수비(약 1,500억 원)가 공사비를 훨씬 상회했다.
한편, 지난해 말 경부고속도로와 정부 청사 등을 비롯한 국가 자산은 전년에 비해 211조 원 증가한 3,221조 3,000억 원으로 나타났다. 도로의 경우 경부고속도로에 이어 인천과 강릉을 잇는 영동고속도로(8조 1,259억 원), 서울과 목포를 잇는 서해안고속도로(7조 9,511억 원) 순으로 집계됐다.
철도의 경우 서울과 부산을 잇는 경부선(7조 6,073억 원)의 가치가 가장 높았다. 세종과 대전, 서울, 과천 등에 자리 잡은 정부 청사의 장부가치는 총 8조 5,000억 원을 기록했다. 이 가장 가치가 높은 정부 청사는 세종 청사로 3조 4,697억 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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