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이충구 사장
정주영 회장 의견 반대
기술 파트의 모든 권한 부여
지난해 현대자동차가 기아와 합산한 글로벌 판매량 순위에서 3위를 차지한 가운데 명실상부한 자동차 업계의 선도업체로 거듭났다. 한국은 지난 1975년 처음으로 자동차 독자 모델을 생산해 내며 전 세계 9번째로 독자 모델을 갖춘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국산 차에 대한 인식은 “싼 맛에 탄다”에 가까웠는데 현재 국산 자동차에 대한 인식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밀리지 않을 정도의 경쟁력이 생긴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이런 경쟁력을 만든 이들은 누구일까?
당초 현대자동차는 정주영 회장이 1940년 인수해 운영한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정비소가 모태다. 이후 아도서비스의 경험을 바탕으로 정주영 회장은 현대자동차의 전신인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한다. 현대차의 역사는 1967년 시작되어 미국 포드사와의 기술제휴 아래 코티나를 생산하는 등으로 시작됐다.
이어 1976년 처음으로 국내에서 독자적으로 생산한 모델로 알려진 포니의 개발 직후 현대자동차는 국산차 개발에 박차를 가한 것으로 확인됐다. 포니의 생산 직후 프레스토와 엑셀이라는 차를 개발 중이었는데 당시 정주영 회장은 후속 국산 차에 관심이 높았다.
정주영 회장은 프레스토와 엑셀이라는 차량의 브리핑을 듣게 되는데, 이 당시 정주영 회장과 말싸움을 벌인 말단직원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이 말단직원은 개발 차량의 브리핑을 맡은 이충구 사장으로 당시 부장 직급을 달고 있었다. 정주영 회장은 개발 중인 차량을 살펴보며 “손잡이를 바꿔라.”라는 뉘앙스의 평가를 내렸다고 전해졌다.
이를 들은 이충구 부장은 손잡이를 바꿀 경우 설계는 물론 시제작까지 이미 들어간 상황에서 차량 손잡이를 바꿀 수 없어 정주영 회장의 의견에 정면 반박한다. 특히 손잡이를 바꿀 경우 수출 일정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점을 덧붙이며 정주영 회장에게 “못 바꾼다”라는 의견을 강하게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도 유명한 “안 되면 되게 하라”라는 경영마인드를 가진 정주영 회장 앞에서 불가능을 선언한 것이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자, 당시 자리에 있던 대부분의 직원은 이충구 부장의 좌천을 예견했다고 한다. 다만, 실제로 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얼마 뒤 정주영 회장은 이충구 부장을 임원진들과의 식사 자리에 부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자리에 있던 한 임원이 ‘제일 구석에 가서 있어라.’라고 말했으며 이충구 부장 역시 부담이 있는 자리일뿐더러 눈에 안 띄는 게 좋다고 생각해 구석에 자리 잡은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이를 발견한 정주영 회장이 ‘그놈 왔냐?’라고 밝히며 이충구 부장을 부른 것으로 확인됐다. 이후 이충구 부장에게 로열 살루트라는 고급술을 따라주며 “잘해”라는 한마디로 격려를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이충구 부장에게 기술 관련 모든 권한을 부여하는 등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실제로 좌천을 생각했던 많은 직원의 예상과 달리 이충구 부장은 현대자동차의 사장직에 올랐다. 이충구 사장은 포니를 만들기 위해 이탈리아로 건너가 설계와 프로토타입 제작 등을 배워 국내 1호 생산차에 적용하는 등의 업적을 인정받아 ‘살아있는 한국 자동차의 역사’로 불리기도 한다.
이어 다른 나라의 차량을 베끼고 비슷한 수준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 우리나라의 기술 2축의 전륜구동 엔진을 개발해 내는 것은 물론 현재도 유명한 엑센트, 아반떼, 에쿠스, 싼타페 등을 만들어냈다. 이 차종은 현재 우리나라를 비롯해 해외 시장에서도 큰 인기를 얻으며 한국 자동차의 명성을 높이고 있다.
한편, 이충구 전 사장은 한국 자동차 산업에 기여한 업적을 인정받아 1978년 산업포장, 1994년 3·1문화상(기술부문), 2000년 금탑산업훈장, 2006년 한국을 일으킨 엔지니어 60인, 2010년 대한민국 100대 기술 주역 선정(한국공학한림원) 등의 포상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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