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봉지의 설탕에서 시작
시대를 읽은 이병철의 전략적 선택
1969년, 삼성전자 설립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의 한국은 폐허와 다름없었다. 국가 경제는 붕괴 상태였고, 국민은 먹을거리조차 제대로 구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기, 한 기업인이 식품 사업을 시작했다. 바로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이다. 이병철 하면 오늘날 누구나 삼성전자를 떠올린다. 그러나 삼성이 전자 산업에 뛰어든 것은 1969년의 일이다. 그는 왜 먼저 설탕을 생산하는 제일제당을 설립했을까? 그의 단순한 사업적 결정이었을까, 아니면 더 큰 그림이 있었던 것일까?
광복 이후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독립했지만, 산업 기반은 극도로 취약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남아있던 산업시설조차 대부분 파괴되었고, 경제를 부흥시킬 뚜렷한 기반이 없는 상태였다. 당시 한국은 미국의 경제 원조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으며, 원조 물자는 주로 밀가루, 설탕, 면화 같은 기초 소비재 위주로 공급되었다.
이병철은 이 점에 주목했다. 그는 단순한 무역업에서 벗어나 제조업을 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너진 경제 속에서 첨단 산업이나 중화학 공업을 시작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는 제조업 실태에 관해 조사하면서 설탕·페니실린·종이 등을 주요 후보로 고려했다. 세 종류 가운데 페니실린이 가장 유망해 보이는 사업이었으나 기술을 습득하기가 쉽지 않았다. 종이 역시 그러했다. 결국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제조업이 바로 식품, ‘설탕’이었다. 당시 한국에는 설탕을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기업이 없었고, 모든 설탕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이 원조 물자로 원당(정제 전의 설탕 원료)을 대량으로 제공하고 있었다. 이병철은 이를 활용해 국산 설탕을 생산하면 안정적인 원료 공급이 가능하고, 동시에 국민에게 필수 식품을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제일제당이었다. 당시 이병철은 제당뿐만 아니라 제분(밀가루)과 통조림 산업으로도 사업을 확대했다.
제일제당의 성공은 빠르게 가시화되었다. 1953년 부산 전포동에서 시작한 공장은 단기간에 국내 설탕 소비량의 30% 이상을 공급할 정도로 성장했다. 당시 외국산 설탕이 1근(600g)에 300환이었는데, 제일제당의 설탕은 100환으로 공급되었다. 품질은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가격 경쟁력이 뛰어나 국민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제일제당이 자리 잡은 후, 이병철은 제조업 확장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다. 1954년에는 제일모직을 설립해 섬유산업에 뛰어들었고, 이후 금융, 유통, 중화학, 전자 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1960년대 후반이 되면서 한국 경제는 본격적인 성장기에 들어섰고, 정부도 수출 주도형 산업 육성 정책을 펼쳤다. 이 시기, 이병철은 전자산업의 미래 가치를 내다보고 삼성전자를 설립하게 된다. 1969년, 그는 수원에 삼성전자 공장을 설립하며 본격적으로 가전제품과 반도체 사업을 시작했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통해 제조업 경험과 자본을 축적하고 전자 산업이라는 더 큰 도전에 나선 것이다.
그는 회고록 ‘호암자전’에 “국민들이 매일 사용하는 제품을 수입에만 의존하면 국가 경제 자립과 경제발전을 가져올 수 없다. 제조업을 통한 국내 산업이 확산돼야 한다. 국산품 제조를 통해 가격은 저렴하고 품질이 좋은 상품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 제조업이 설립되면 지역경제에도 도움이 되고 많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고 기술 축적으로 경제와 산업 활동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다”라고 썼다.
이병철이 제일제당을 먼저 설립한 것은 단순한 식품 사업이 아니라, 삼성이 제조업 기업으로 성장하는 첫걸음이었다. 그는 당시 한국의 경제 현실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가장 현실적인 방법으로 제조업 기반을 다지는 전략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결국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초석이 되었다. 이병철의 선택은 시대를 읽는 통찰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삼성전자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알고 있지만, 그 시작은 단순한 무역업도, 전자산업도 아닌, 한 봉지의 설탕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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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후 .